95. 상실의 시대
요즘 사진 찍는 감각이 죽었는지 맘에 드는 사진이 통 건져지질 않는다. 남편과 난 각자의 볼 일이 있어 창원에 왔다. 오전 볼일을 마치고 창원 <리프레쉬> 샌드위치와 샐러드 카페에 와서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요즘 읽고 있는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와 색감이 어울려 살포시 흰 테이블 위에 얹었더니 예쁘다.
남편이 썩 좋아하는 메뉴는 아니지만 가로수길까지 왔는데 분위기 좀 내보고 싶었다. 확실히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온다. 한 무리의 아가씨들이 주문해서 가져간 걸 보니 피크닉 세트인데 정말로 라탄 피크닉 가방에 샌드위치와 샐러드, 음료가 담겨 있다. 피크닉 세트를 가지고 그들은 매장 밖으로 나갔다. 어디 공원으로 가서 먹으려는 거겠지. 난 저 피크닉 가방은 나중에 반납하는 건지, 아니면 가격에 포함되는 건지 궁금했다. 나중에 반납하러 오기엔 귀찮을 테고, 가격에 포함한다면 적은 금액은 아닐텐데. 암튼 피크닉 세트 아이디어는 괜찮아 보였다.
점심을 먹고 나니 배부른 몸을 이끌고 문득 걸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된 치과 진료 시간까지는 넉넉하게 남아 있는데다가 치과까지는 불과 1.3km밖에 되지 않아 가로수길을 지나 치과병원까지 남편과 같이 걸어 난 치과로 남편은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 가기로 했다.
주말이라 가로수길은 데이트하는 연인들, 젊은 부부들로 붐볐다. 길가에 즐비한 카페나 식당 테라스에도 앉아 있는 사람이 제법 보인다. 예전 같으면 코로나시국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큰일 날 듯 법석을 떨었을텐데 오늘만큼은 코로나 이전같은 어느 날씨 좋은 주말을, 활기가 넘치는 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가로수길의 카페를 구경하는 것도 재밋거리다.
오늘 내 눈길을 가장 확 끈 곳은 마리옹 알베또.
허물어진 벽돌담이 있어 빈티지 느낌이 나는데 가까이서 보니 일부러 이렇게 만든 컨셉이다. 상실의 미학인가.
가로수길이 좋은 건 뭐니뭐니해도 메타세콰이아 때문이다. 아직도 초록 초록한 빛깔이 상큼하다. 메타세콰이아는 아직 가을을 맞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메타세콰이아 때문에 가로수길이 좋지만 볼 때마다 교차하는 반감은 굳게 위로 뻗은 웅장한 나무기둥 아래의 모습에서 나온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맑은 산소도 뿜어 주고, 그늘도 만들어 주고, 운치를 주지만 정작 사람들은 메타세콰이아를 좁은 틀 안에 가두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각 틀로 둘러 싼 것도 모자라 그 안의 흙을 작은 자갈돌로 덮어 압착시켰다. 마치 깨강정처럼. 빗물이 제대로 들어갈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꼭꼭 덮고 누르고 가둔다하더라도 뿌리가 뻗으려는 자연의 힘을 거스를 수 없는 법.
겨울이 되면 트리전구로 칭칭 감겨있고, 뿌리는 숨 막히듯 갇힌 모습을 보면 미안해서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곤 했다.
치과에 갔던 나는 가장 안쪽의 어금니 하나를 발치했다. 2주 전 치주과 원장은 발치하자고 할만큼 오랜 시간 악화되고 있던 어금니였는데 치주과 원장은 발치 후 임플란트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난 임플란트를 하지 않고 이를 비워두고 살아야 한다는 상실감을 갖고 싶지 않았다. 원장은 그럴만하다고 판단해서 말한 것이겠지만 보철과에서는 어떻게 진단하는지 의견을 듣고 싶어서 일단 발치 결정을 내리지 않고 그날은 집에 그냥 왔었다.
그런 어금니인데 며칠 전부터 잇몸에 물집이 잡힌 것처럼 손톱만하게 염증이 자리 잡아 급히 예약을 잡고 치과병원에 왔던 것이다. 예상대로 염증인데 어금니뿌리로부터 생긴 염증이라 발치를 해야한다고 다시 진단이 나왔다. 이대로 두면 어떻게 되냐고 물으니 윗쪽 어금니라서 코쪽인 축농증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임플란트 할 필요없다는 치주과 원장에게 임플란트를 하고 싶다고 의사를 표했지만 굳이 그에게 강하게 고집할 필요는 없어서 우선 발치해서 불편한게 없는지 지켜보겠다고 하고 발치를 했다.
내가 걱정하는 부분은 이가 빠진 자리에 옆의 치아들이 움직이는 노파심인데 보통 치아들은 앞쪽으로 움직이지 뒤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의사가 말해도 왜이리 미심쩍은지...내 경험상 그러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원장님을 믿고 치주과를 다녔던 17년의 세월도 소용없게 만든다.
난 왜 이렇게 의심이 많은 건가.
암튼 마취를 한 후 어금니는 정말 느끼지 못할 만큼 쉽게 뽑혔다.
내 몸의 어느 구석이 이렇게 상실되는구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인의 시어머니 부고를 들었다. 집에 와 옷을 갈아 입고 바로 산청의 장례식장을 갔다.
시부모님 두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시다가 승용차와 충돌하여 시어머님은 현장에서 사망하시고 시아버진 수술 후 회복실에 계시는데 부인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신 상태다 한다. 아내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고 자책하시는 아버지를 병원에 두고 장례를 치러야 하는 가족들 모두 얼마나 황망할지...
돌아가신 분도 애석하지만 아내를 잃고 자책까지 하실 어르신의 심정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고인과 살아 남으신 어르신 두 분 앞에서 어금니 발치부위에 지혈솜을 악물고 있으려니 이쯤은 대수롭지 않은 상실이 되버렸다.
더 갖는 기쁨과 상실의 슬픔을 등호나 부등호로 표시한다면 내 인생의 지금은 어떤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상실의 슬픔으로 부등호가 벌어질 일이 많아지겠지.
지금 당장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밤이었다.